
월요일 아침 8시 40분, 제트로봇 회의실에는 아직 커피 냄새보다 납땜 냄새가 더 진하게 남아 있었다.
로봇 관절 모듈 테스트가 밤새 이어졌는지, 개발팀 몇 명은 후드티 차림으로 회의실 한쪽에 기대 앉아 있었다. 누군가는 노트북을 열어둔 채 눈을 감고 있었고, 누군가는 배터리 발열 데이터를 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날 배차장은 첫 전사 HR 제도 설명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얼마 전까지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아는 테크 대기업에서 인사기획을 담당했다. 글로벌 직무등급, 리더십 역량 모델, 평가 캘리브레이션, 보상밴드, HRIS 데이터 리포트까지. 배차장에게 인사제도란 정교하게 설계된 운영체제 같은 것이었다. 좋은 구조를 만들고, 기준을 세우고, 리더를 교육하면 조직은 조금씩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움직인다고 믿었다. 그 믿음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 믿음을 제트로봇이라는 회사에 너무 빠르게 얹으려 했다는 데 있었다.
제트로봇은 최근 시리즈 C 투자를 받은 로봇 스타트업이었다. 내년 IPO를 목표로 하고 있었고, 대표이사인 태사장은 자신이 보유한 핵심 특허와 기술력을 바탕으로 회사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그는 기술에는 누구보다 집요했고, 고객사 데모 일정에는 무서울 만큼 예민했다. 회사의 생존은 아직 제도보다 제품에 더 가까웠다. 태사장의 동생인 태전무는 경영지원실장을 맡고 있었다. 창업 초기부터 회계, 총무, 구매, 급여, 정부지원사업, 사무실 이사, 직원 경조사까지 챙겨온 사람이었다. 공식 조직도상으로는 경영지원실장이었지만, 실제로는 회사의 기억 저장소에 가까웠다. 누가 언제 들어왔고, 누가 어떤 위기를 넘겼고, 누가 대표와 밤새 시제품을 고쳤는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회사에 배차장이 들어왔다. 직책은 인사팀장. 미션은 평가·보상 제도 구축. 목표는 IPO 준비에 맞는 HR 체계 정비.
배차장은 입사 첫 주부터 빠르게 움직였다. 기존 자료를 검토했고, 인사 데이터를 모았다. 조직도를 다시 그렸고, 직군을 나누었다. 개발, 제품, 품질, 생산, 사업개발, 경영지원 직무를 분류했다. 이어서 직무등급 초안, 평가등급 5단계, MBO 기반 목표관리 제도, 성과급 지급 기준, 스톡옵션 부여 원칙, 핵심인재 리텐션 프로그램, 리더십 역량 모델, 팀장 평가자 교육안을 만들었다. 대기업에서라면 이 정도 속도는 꽤 유능한 움직임이었다. 그런데 제트로봇에서는 달랐다.

첫 번째 임원회의에서 배차장은 42페이지짜리 평가·보상 제도안을 띄웠다. 첫 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IPO 준비를 위한 성과관리 및 보상체계 고도화 방안.”
배차장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재 제트로봇은 성장 속도에 비해 직무체계, 평가 기준, 보상 기준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IPO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사람에 대한 의사결정도 데이터와 기준에 근거해야 합니다. 우선 직무등급 체계를 세우고, 전사 MBO를 기반으로 평가등급을 운영한 뒤, 성과급과 스톡옵션을 연동하는 방향을 제안드립니다.”
말은 맞았다. 정말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맞는 말이 항상 먹히는 말은 아니다.
태사장은 팔짱을 낀 채 화면을 보다가 물었다.
“배차장, 이거 좋은 건 알겠는데요. 우리 개발팀이 지금 다음 주 고객사 데모 때문에 밤새고 있어요. 이걸 지금 할 수 있습니까?”
회의실 공기가 살짝 무거워졌다. 배차장은 침착하게 답했다.
“대표님, 그래서 더 필요합니다. 지금 기준을 만들지 않으면 나중에는 더 혼란스러워집니다. 특히 IPO 전에 평가와 보상 기준이 불명확하면 핵심인재 리텐션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태전무가 입을 열었다.
“배팀장님, 이론은 좋은데요. 우리 회사는 아직 그렇게 칼로 자르듯이 사람 평가하면 분위기 깨집니다. 여기 있는 초기 멤버들은 월급 적을 때도 버틴 사람들이에요. 그걸 평가등급 몇 개로 나누면 반발이 큽니다. 아직은 가족처럼 가야죠.”
배차장은 속으로 생각했다. ‘가족처럼 간다는 말이 가장 위험한데.’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대신 보상 기준의 투명성을 설명했다. 그러나 설명이 길어질수록 태전무의 표정은 굳어졌고, 태사장의 시선은 슬라이드가 아니라 휴대폰 고객사 메시지로 향했다.
회의가 끝난 뒤, 기존 인사팀 멤버인 윤대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팀장님, 자료는 정말 좋은데요. 지금 팀장님들이 이걸 다 따라올 수 있을까요? 솔직히 지금 평가등급보다 채용 마감이 더 급하다고 느끼는 팀도 많아요.”
배차장은 잠시 말을 멈췄다. 윤대리의 말에는 반박하기 어려운 현실이 있었다. 기존 인사팀 멤버들은 제도기획 경험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회사의 속사정을 알고 있었다. 누가 대표에게 직접 보고하는지, 어느 팀장이 사람관리를 어려워하는지, 어떤 개발자가 스톡옵션에 민감한지, 어떤 초기 멤버가 신규 입사자의 높은 연봉에 상처를 받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엑셀 피벗은 서툴렀지만, 조직의 체온은 알고 있었다.
배차장은 그 체온을 아직 몰랐다. 그가 가져온 제도는 성숙기 회사에서는 설득력 있는 운영체제였다. 그러나 제트로봇은 아직 운영체제를 설치하기 전에 전원 케이블이 자주 빠지는 회사였다. 목표는 매달 바뀌었고, 제품 일정은 고객사 요청에 따라 흔들렸다. 개발팀장은 인사평가보다 부품 수급을 더 걱정했고, 사업개발팀은 계약서보다 데모 성공 여부에 목숨을 걸었다. 그런 조직에 “연초 목표 설정, 중간 리뷰, 연말 평가, 등급 배분, 보상 연동”이라는 말을 들이밀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은 제도를 이해하기 전에 먼저 불안해한다. 배차장이 진짜로 무너진 순간은 첫 직원 설명회에서였다.

회의실에는 개발자, 품질 담당자, 사업개발 담당자, 경영지원 직원들이 모였다. 배차장은 최대한 쉽게 설명하려고 했다.
“이번 평가제도는 줄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회사가 성장하면서 각자의 역할과 기여를 명확히 보고, 성과에 맞게 보상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그때 한 개발자가 손을 들었다.
“우리 팀은 목표가 계속 바뀌는데요. 고객사 데모 일정도 바뀌고, 대표님 지시도 바뀝니다. 그러면 MBO를 어떻게 고정하나요?”
다른 직원이 물었다.
“대표님이 직접 뽑은 사람과 일반 직원이 같은 기준으로 평가받나요?”
조용히 있던 초기 멤버 한 명도 입을 열었다.
“스톡옵션은 성과보상인가요, 입사보상인가요, 충성도 보상인가요? 초기에 낮은 연봉 받고 들어온 사람들은 어떻게 반영되나요?”
마지막 질문은 더 날카로웠다.
“평가등급이 낮으면 내년에 IPO 전에 정리 대상이 되는 건가요?”
배차장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그 질문들은 제도 설계안의 빈칸이 아니었다. 그 질문들은 조직 안에 쌓여 있던 불신과 불안이었다. 배차장은 그제야 알았다. 이 회사에는 평가제도가 없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제도를 믿을 수 있는 공통 언어가 아직 없었다. 구성원들은 “성과”라는 말을 서로 다르게 이해하고 있었다. 대표에게 성과는 고객사 데모 성공이었다. 개발팀에게 성과는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사업개발팀에게 성과는 계약 가능성을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초기 멤버에게 성과는 어려울 때 회사를 떠나지 않은 헌신이었다. 신규 입사자에게 성과는 시장가치에 맞는 전문성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배차장은 이 서로 다른 성과의 언어를 맞추기 전에 평가등급부터 꺼냈다.
쉽게 말하자면 이런 거다. 아랫동생이 처음 자취를 시작했는데, 냉장고에 먹을 것도 없고, 전기밥솥도 없고, 싱크대 물도 잘 안 내려간다. 그런데 옆에서 “식단 관리 앱부터 깔자”고 하는 셈이다. 틀린 말은 아닌데 순서가 안 맞는 거다.
배차장의 첫 번째 착각은 좋은 제도는 어디서나 좋은 결과를 낸다는 믿음이었다. 두 번째 착각은 평가·보상 제도는 설계가 완성되면 실행된다는 믿음이었다. 세 번째 착각은 대표가 승인하면 조직은 따라온다는 믿음이었다. 네 번째 착각은 인사팀장은 정답을 제시하는 사람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런데 스타트업 HR은 조금 다르다.
정답을 제시하기 전에, 사람들이 무엇을 문제라고 느끼는지부터 들어야 한다. 제도를 설계하기 전에, 조직이 어느 정도의 제도를 소화할 수 있는지 봐야 한다. 평가표를 만들기 전에, 리더들이 성과 대화를 할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보상밴드를 만들기 전에, 회사가 어떤 기여를 더 높게 인정할 것인지부터 합의해야 한다.
그날 밤, 배차장은 사무실에 혼자 남았다. 42페이지짜리 제도 설계안을 다시 열었다. 문서에는 빈틈이 거의 없었다. 직무등급도 있었고, 평가등급도 있었고, 보상 연동 로직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문서가 너무 멀게 느껴졌다. 회의실 화이트보드에는 직원들이 던진 질문 몇 개가 아직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목표가 계속 바뀌면 평가는 어떻게 하나요?”
“스톡옵션은 무엇에 대한 보상인가요?”
“초기 멤버의 헌신은 어떻게 인정되나요?”
“평가가 구조조정 신호는 아닌가요?”
배차장은 한참 동안 그 문장들을 바라봤다. 그날 밤 배차장은 자신이 가져온 두꺼운 제도 설계안보다, 회의실에 남은 직원들의 질문 몇 줄이 더 무겁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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