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차장이 제트로봇에 입사한 지 5개월째 되던 금요일 저녁이었다. 대부분의 직원은 퇴근했지만, 7층 회의실 불은 아직 켜져 있었다. 회의실 안에는 배차장, 태사장, 태전무, 그리고 개발본부장이 앉아 있었다. 안건은 평가·보상 제도 재논의였다. 말은 재논의였지만, 회의실 안에는 이미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태사장이 먼저 말했다. “배차장, IPO 준비 때문에 인사제도가 필요하다는 건 압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한테 제일 중요한 건 제품 완성입니다. 투자자들도 결국 기술과 매출을 봅니다. 평가제도 때문에 팀장들이 시간을 너무 많이 쓰면 곤란합니다.”
배차장은 차분히 답했다. “대표님, 제품 완성이 중요한 건 맞습니다. 그런데 제품을 완성할 핵심인력이 빠져나가면 더 큰 문제입니다. 지금 보상 기준이 불명확하고, 스톡옵션 기대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이걸 방치하면 IPO 전에 인재 리스크가 커질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태전무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배팀장님 방식은 너무 정석이에요. 우리 회사는 지금까지 사람 보고 결정했습니다. 누가 고생했는지, 누가 진짜 필요한 사람인지 대표님과 제가 다 압니다. 그걸 꼭 문서로 남겨야 합니까?”
배차장은 평소보다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전무님, IPO를 준비하려면 사람 보고 결정했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예외가 있더라도 예외의 이유가 기록되어야 합니다.”
태전무의 얼굴이 굳었다. “그 말은 지금까지 우리가 주먹구구로 했다는 뜻입니까?”
회의실 공기가 차가워졌다. 배차장은 그 순간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직감했다. 말의 내용은 맞았지만, 상대가 들은 의미는 달랐다. 배차장은 “기준을 만들자”고 말했지만, 태전무는 “당신들이 해온 방식은 틀렸다”고 들었다.
이런 장면, HR 담당자라면 한 번쯤 겪어봤을 거다. 우리는 제도를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는 자신의 지난 시간을 평가받는다고 느낀다. 우리는 투명성을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는 권한을 빼앗긴다고 느낀다. 우리는 리스크 관리를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는 불신한다고 느낀다. 스타트업에서 인사제도를 수립할 때의 어려운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제도는 종이에 쓰이지만, 그 제도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과거의 고생, 관계, 서운함, 불안, 자존심이 같이 들어 있다. 배차장은 그걸 늦게 깨달았다.

기존 인사팀과의 관계도 삐걱거렸다. 배차장은 매주 제도기획 회의를 열었지만, 팀원들의 표정은 점점 지쳐갔다. 윤대리는 어느 날 조심스럽게 말했다.“팀장님, 죄송한데요. 이번 주에도 채용 면접 조율이 23건이고, 급여 마감도 있고, 정부지원사업 실사 자료도 준비해야 합니다. 평가제도 자료까지 만들려니 솔직히 너무 벅찹니다.”
배차장은 대답했다. “알아요. 그런데 지금 이걸 안 해두면 나중에 더 힘들어집니다.”
그 말도 맞았다. 그런데 맞는 말이 사람을 움직이지 못할 때가 있다. 윤대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팀장님은 나중을 보지만, 우리는 오늘 터지는 일을 막고 있는데.’
배차장은 제도기획을 하고 있었고, 팀원들은 회사를 버티게 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둘 다 필요했다. 그런데 서로의 일을 낮게 보고 있었다.
직원들의 불안도 커졌다. 개발팀에서는 “이번 평가가 IPO 전에 사람 정리하려는 신호 아니냐”는 말이 돌았다. 사업개발팀에서는 “매출이 아직 고객사 PoC(실증 테스트) 중심인데 성과급 기준을 어떻게 잡을 거냐”는 불만이 나왔다. 초기 멤버들은 “신규 입사자 연봉은 높은데, 우리가 버틴 시간은 누가 인정하느냐”고 말했다. 반대로 신규 입사자들은 “초기 멤버라는 이유로 계속 예외를 인정하면 전문인력이 버티기 어렵다”고 했다.
배차장은 점점 답답해졌다. 그는 틀린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도 그랬다. IPO를 앞둔 회사라면 평가·보상 기준, 스톡옵션 운영 원칙, 핵심인재 관리, 리더십 파이프라인을 정리해야 한다. 문제는 방향이 아니라 속도와 순서였다. 결국 배차장은 전 직장 선배인 봉전무를 찾아갔다. 봉전무는 현재 중견 로봇기업 브이로봇의 인사담당 임원이었다. 대기업, 스타트업, 중견기업을 모두 겪은 사람이었다. 배차장은 봉전무 앞에 자신이 만든 제도안을 펼쳐놓았다. 직무등급, 평가체계, 보상밴드, 스톡옵션 기준, 리더십 역량 모델까지. 자료만 보면 흠잡을 데가 많지 않았다.

봉전무는 한참 자료를 보다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배차장, 제도 자체는 틀리지 않았어.”
배차장은 조금 안도했다. 그런데 봉전무가 이어 말했다. “그런데 순서가 틀렸어.” 배차장의 표정이 굳었다.
봉전무는 천천히 말했다. “너는 지금 성숙기 회사의 운영체제를 성장기 회사에 통째로 설치하려고 한 거야. 대기업에서는 서버도 있고, 보안팀도 있고, 사용자 교육도 있고, 장애 대응 프로세스도 있어. 그런데 스타트업은 아직 전원선도 흔들리고, 책상도 부족하고, 사람들이 동시에 세 가지 일을 해. 거기에 무거운 운영체제를 올리면 멈춰.”
배차장은 반박하고 싶었지만, 할 말이 없었다.
봉전무가 다시 말했다. “스타트업은 제도를 싫어하는 게 아니야. 자기들의 생존 속도를 무시하는 제도를 싫어하는 거야.”
그 말이 배차장에게 꽂혔다.
봉전무는 종이에 세 줄을 적었다.
첫째, 하드스킬은 더 정교하게. 둘째, 소프트스킬은 더 낮게. 셋째, 실행 순서는 더 작게.
“무슨 의미로 쓰신 것인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배차장이 말하자 봉전무가 웃었다.
“제도 이름부터 들이밀지 말고, 지금 회사가 겪는 문제를 정확히 캐치해야 해. 예를 들어 평가등급 5단계를 바로 도입하는 게 아니라, 먼저 이 회사에서 성과가 무엇인지 맞춰야지. MBO를 도입하기 어렵다면 OKR이나 마일스톤 방식으로 시작할 수 있어. 보상밴드도 처음부터 완성형으로 만들지 말고, 가이드라인부터 시작해. 스톡옵션은 숫자보다 메시지가 중요해. 이게 입사 옵션인지, 성과 보상인지, 장기 리텐션인지 구성원이 이해해야 해.”
배차장은 메모하기 시작했다. 봉전무는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소프트스킬. 너는 대표를 설득하려고 하지? 그러지 마. 대표의 언어로 말해야 해. 대표에게 ‘평가제도가 필요합니다’라고 말하면 업무가 늘어나는 소리로 들려. 대신 ‘핵심 기술인력 세 명이 빠지면 고객사 데모와 IPO 일정이 동시에 흔들립니다’라고 말해야 해. 그게 대표의 리스크 언어야.”
배차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전무와의 관계에 대해서 조언을 요청드립니다.”
봉전무가 바로 답했다. “태전무를 반대세력으로 보면 안 돼. 그 사람은 조직 기억을 가진 사람이야. 물론 비공식 권한을 내려놓기 싫은 마음도 있겠지. 하지만 그 사람이 알고 있는 과거 보상 결정, 초기 멤버의 기여, 대표의 판단 기준은 네가 반드시 배워야 할 데이터야. HRIS에는 없지만, 회사 안에는 있는 데이터지.”
배차장은 그 말을 듣고 윤대리와 태전무의 얼굴을 떠올렸다.
봉전무는 마지막으로 실행 순서를 말했다. “제도를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야. 회사가 소화할 수 있는 수준으로 단계적으로 적용하라는 거야.”
그리고 6개월 재정비 로드맵을 제안했다. 첫 달에는 제도안을 고치지 말고 사람을 만나라고 했다. 대표, 태전무, 팀장, 핵심인재를 인터뷰하고, 현재 평가·보상 불만 지도를 만들라고 했다. 두 번째 달에는 직무별 핵심 성과 질문을 정리하고, 팀별 목표관리 수준을 진단하라고 했다. 세 번째 달에는 평가등급보다 성과 대화 가이드를 먼저 도입하라고 했다. 네 번째 달에는 보상 원칙 다섯 개를 만들고, 스톡옵션 부여 기준 초안을 잡으라고 했다. 다섯 번째 달에는 파일럿 평가와 평가자 캘리브레이션을 작게 운영하라고 했다. 여섯 번째 달에는 대표, 태전무, 팀장들이 함께 합의한 제도 개선안을 만들라고 했다.
배차장이 물었다. “그럼 제가 만든 제도안은 버려야 합니까?”
봉전무가 웃었다. “아니. 버리지 마. 그건 네 무기야. 다만 칼집에서 꺼내는 타이밍을 배워야지. 스타트업 HR은 정답을 배포하는 일이 아니라, 문제를 함께 정의하게 만드는 일이야.”
그날 배차장은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했다.자신은 지금까지 제도를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제트로봇에 먼저 필요한 것은 제도가 아니라 대화의 순서였다. 평가제도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성과에 대한 공통 언어였다. 보상제도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무엇을 인정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였다. 스톡옵션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미래 가치에 대한 설명이었다. 팀장 교육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팀장들이 사람과 성과를 이야기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신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사팀장이 먼저 배워야 할 것은 “내가 아는 정답”이 아니라 “이 회사가 감당할 수 있는 변화의 크기”였다.
다음 주 월요일, 배차장은 출근하자마자 자신의 PPT 첫 장을 지웠다. 그리고 노트 첫 장에 이렇게 적었다.
“이 회사 사람들은 무엇을 성과라고 믿고 있는가?” 그 질문 하나가, 배차장의 두 번째 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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