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차장은 달라졌다. 눈에 띄게 말투가 부드러워졌다는 뜻은 아니다. 갑자기 사람 좋은 팀장이 되었다는 뜻도 아니다. 배차장은 여전히 숫자를 봤고, 기준을 중시했고, 문서화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다만 순서가 바뀌었다. 예전의 배차장이 제도를 전면에 내세웠다면,
이제는 질문을 먼저 꺼냈다. 예전의 배차장은 글로벌 스탠다드를 말했다. 이제는 제트로봇의 현재 체력을 먼저 물었다. 예전의 배차장은 대표 승인을 받으면 조직이 움직일 거라 생각했다. 이제는 팀장과 구성원이 납득하지 못하는 제도는 회의실 밖에서 멈춘다는 걸 알았다.
그가 처음 한 일은 평가제도 개정이 아니었다. 인터뷰였다. 배차장은 태사장과 다시 마주 앉았다. 이번에는 42페이지짜리 자료를 들고 가지 않았다. A4 한 장만 가져갔다. 제목은 간단했다. “IPO 전 제트로봇의 인재 리스크 질문.”
태사장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오늘은 제도 설명 아니네요?”
배차장이 웃으며 답했다. “네. 오늘은 대표님이 걱정하시는 리스크를 먼저 듣고 싶습니다.”
태사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제일 걱정되는 건 핵심 개발자 이탈입니다. 로봇 관절 제어 알고리즘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그리고 고객사 데모를 리드할 수 있는 사람도 제한적입니다. 또 하나는 팀장들이 너무 기술만 보고 사람관리를 못한다는 겁니다.”
배차장은 그 말을 적었다. “그럼 대표님께 성과란 무엇입니까?”
태사장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한참 뒤에 말했다. “결국 고객이 우리 기술을 신뢰하게 만드는 결과겠죠. 데모 성공, 제품 안정화, 양산 가능성, 투자자 설득. 그런 것들이요.”
배차장은 그날 처음으로 대표의 성과 언어를 들었다. 그전까지 배차장은 대표에게 평가제도 필요성을 설명하려 했다. 이제는 대표가 성과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듣기 시작했다.
다음은 태전무였다. 예전 같았으면 배차장은 보상 승인 프로세스의 문제를 지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게 시작했다.
“전무님, 창업 초기부터 지금까지 보상이나 스톡옵션 결정에서 기억나는 사례를 듣고 싶습니다. 누가 왜 예외를 받았는지, 어떤 판단이 있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태전무는 처음에는 경계했다. 그러나 배차장이 진지하게 배우려는 태도를 보이자 조금씩 말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진짜 돈이 없었습니다. 어떤 친구는 대기업 연봉 절반 받고 왔어요. 어떤 팀장은 자기 지인 데려오려고 대표님과 밤새 설득했고요. 스톡옵션도 사실 명확한 기준이 있었다기보다는, 놓치면 안 되는 사람부터 챙긴 겁니다.”
배차장은 그 말을 들으며 깨달았다. 주먹구구로 보였던 결정 안에도 나름의 맥락이 있었다. 다만 그 맥락이 기록되지 않았고, 기준으로 번역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배차장은 태전무에게 말했다. “전무님, 그동안 해오신 방식이 틀렸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안에 있는 판단 기준을 꺼내서, 앞으로도 설명 가능한 기준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태전무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럼 우리 방식도 일부는 남길 수 있는 겁니까?”
“네. 다만 앞으로는 사람 머릿속이 아니라 회사 기준 안에 남겨야 합니다.”
그 대화 이후 태전무는 조금씩 협조하기 시작했다.
배차장이 세 번째로 한 일은 기존 인사팀 멤버들과의 관계를 다시 세우는 일이었다.
그는 윤대리와 팀원들을 불러 말했다. “제가 처음에 제도기획을 너무 앞세웠습니다. 여러분이 해온 일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급여, 채용, 입퇴사, 근태, 정부지원사업, 이런 일들이 없으면 회사는 하루도 못 굴러갑니다. 여러분이 해온 일이 임시방편이었던 게 아닙니다. 그건 회사가 버티기 위한 운영 방식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 방식을 부끄러워하는 게 아니라, 다음 단계에서도 작동하도록 정리하는 겁니다.”
윤대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 팀 회의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배차장은 제트로봇의 문제를 이렇게 재정의했다. “제트로봇의 문제는 평가제도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성장 속도에 비해 성과를 정의하는 언어, 보상을 결정하는 기준, 핵심인재를 붙잡는 메시지가 부족한 것이다.”이 정의가 나오자 해법도 달라졌다.
첫 번째 솔루션은 평가제도 도입이 아니라 “성과 대화”였다. 배차장은 전사 목표를 세 개로 단순화했다. 첫째, 핵심 로봇 모듈의 고객사 데모 성공률을 높인다. 둘째, 양산 전 품질 안정성을 확보한다. 셋째, IPO 준비를 위한 매출·조직·리스크 기반을 만든다.
그 다음 팀별 목표는 연간 MBO로 고정하지 않았다. 대신 분기별 마일스톤으로 바꿨다. 스타트업에서는 시장 상황, 고객 요청, 제품 일정이 빠르게 바뀐다. 이런 조직에 연초 목표를 고집하면 목표관리가 아니라 변명관리가 된다.
배차장은 팀장들에게 말했다. “올해 목표를 완벽히 고정하자는 게 아닙니다. 이번 분기에 무엇을 결과물로 볼 것인지 합의하자는 겁니다. 바뀔 수 있습니다. 다만 바뀌면 왜 바뀌었는지 기록해야 합니다.”
그는 평가표보다 성과 대화 질문지를 먼저 만들었다. 이번 달 가장 중요한 결과물은 무엇인가. 그 결과물이 회사의 제품, 고객, 투자자 목표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다음 달 성과를 막을 가장 큰 병목은 무엇인가. 리더가 제거해줘야 할 장애물은 무엇인가. 보상이나 인정이 필요한 기여는 무엇인가.
처음에는 팀장들이 어색해했다. 개발팀장 한 명은 말했다. “이런 대화는 해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냥 일 잘하면 알고, 못하면 티가 나니까요.”
배차장은 웃으며 답했다. “그게 20명일 때는 됩니다. 그런데 100명이 넘어가면 ‘티가 난다’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어떻게 평가받는지 모르면 성과보다 눈치를 보게 됩니다.”
성과 대화는 거창한 제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조직의 언어를 맞추는 첫 번째 장치가 되었다.
두 번째 솔루션은 보상제도를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설명 가능한 보상 원칙을 세우는 일이었다. 배차장은 태전무, 재무담당자, 주요 팀장들과 함께 과거 보상 사례를 펼쳐놓았다. 누가 높은 연봉으로 들어왔는지, 누가 낮은 연봉을 감수했는지, 누가 스톡옵션을 받았는지, 누가 성과급을 받지 못해 서운해했는지를 정리했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사실이 드러났다. 초기 멤버는 헌신을 인정받고 싶어 했다. 신규 전문가들은 시장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했다. 핵심 기술인력은 장기적 보상을 원했다. 사업개발 인력은 실적과 보상의 연결을 원했다. 경영지원 인력은 자신들의 기여가 보이지 않는다고 느꼈다. 서로 다른 기대를 하나의 평가등급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배차장은 보상 원칙을 다섯 개로 정리했다.
첫째, 시장가치가 높은 직무는 외부 시장 기준을 참고한다.
둘째, 회사의 핵심 특허, 제품, 고객 확보에 직접 기여한 역할은 별도로 인정한다.
셋째, 스톡옵션은 단순 근속 보상이 아니라 미래 가치 창출에 대한 장기 인센티브로 운영한다.
넷째, 성과급은 회사의 현금흐름과 개인 기여를 함께 반영한다.
다섯째, 예외 보상은 가능하지만 예외의 사유는 반드시 기록한다.
이 다섯 문장이 완벽한 보상제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직원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출발점은 되었다.
배차장은 직원 설명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만족하는 보상제도는 없습니다. 특히 성장기 스타트업에서는 더 어렵습니다. 다만 회사는 앞으로 보상을 감으로만 결정하지 않겠습니다. 시장가치, 역할의 중요도, 회사 성과, 개인 기여, 장기 리텐션 필요성을 기준으로 설명 가능한 결정을 하겠습니다.”
그 말에 모든 직원이 박수를 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질문의 결은 바뀌기 시작했다.
“왜 나는 적게 받느냐”에서 “내 역할은 어떤 기준으로 평가되느냐”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 차이는 크다. 불만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불만을 이야기할 수 있는 언어가 생긴 것이다.
세 번째 솔루션은 IPO 준비 HR 리스크 리포트였다. 배차장은 더 이상 “평가제도 도입안”이라는 제목을 쓰지 않았다. 대신 이런 제목을 붙였다. “IPO 전 제트로봇 인재·보상·조직 리스크 점검.”
리포트에는 핵심 기술인력 이탈 리스크, 창업자 의존도, 가족 경영 구조에 따른 의사결정 투명성, 보상 기준 불명확성, 스톡옵션 커뮤니케이션 부족, 평가 기준 미정립, 팀장 성과관리 역량 부족, 신규 입사자와 초기 멤버 간 심리적 계약 차이, 인사 데이터 부재, 승계 및 리더십 파이프라인 부족이 담겼다. 태사장은 그 리포트를 한참 읽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이제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습니다. 이건 인사제도가 아니라 IPO 전에 우리가 정리해야 할 경영 리스크네요.”
배차장은 그 말이 반가웠다. 드디어 인사제도가 대표의 언어로 번역된 것이다.
태전무도 말했다. “배팀장, 예전에는 우리 방식이 무시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기록으로 남겨야 할 것도 많네요. 나중에 누가 봐도 설명이 되어야 하니까요.”
그 순간 배차장은 알았다. 소프트스킬이란 부드럽게 말하는 기술만이 아니다. 상대가 지키고 싶은 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다음 단계의 언어로 바꿔주는 능력이다.
몇 달 뒤, 제트로봇형 평가·보상 체계는 처음보다 훨씬 작아진 모습으로 시작되었다.
첫 단계는 성과 언어 정렬이었다. 회사 목표 세 개, 팀별 분기 마일스톤, 개인별 핵심 결과물, 리더의 지원 과제를 맞췄다.
두 번째 단계는 역할·책임 레벨 정의였다. 직무등급이라는 무거운 이름 대신, 역할의 크기와 책임 범위를 먼저 정리했다. 기술, 제품, 사업, 운영, 경영지원 직군별로 “이 역할이 커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정의했다.
세 번째 단계는 성과 대화 운영이었다. 월 1회 팀장과 구성원이 체크인하고, 분기별로 목표를 리뷰했다. 반기에는 평가자 캘리브레이션을 열어 팀장들이 서로의 평가 기준을 맞췄다.
네 번째 단계는 보상 원칙 수립이었다. 기본급은 시장가치와 내부 형평을 함께 봤고, 성과급은 회사 성과와 개인 기여를 함께 반영했다. 스톡옵션은 장기 가치 창출과 리텐션 목적을 분명히 했다. 승진은 연차가 아니라 역할 확대와 조직 영향력을 기준으로 보기 시작했다.
다섯 번째 단계는 IPO HR 리스크 관리였다. 핵심인재 리텐션, 보상 투명성, 주식보상 커뮤니케이션, 리더십 파이프라인, 인사 데이터 정합성, 조직문화 리스크를 분기마다 점검했다.
완성형 제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작동하는 제도였다. 배차장은 이제 대기업에서 배운 것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잘 쓰게 되었다. 다만 그대로 복사하지 않았다. 제트로봇의 성장단계, 권력구조, 사업모델, 사람의 수준에 맞게 번역했다.
마무리: 30대~40대 인사담당자에게 주는 현실적인 조언 5가지
첫째, 대기업의 경험은 버릴 필요가 없다. 다만 그대로 들고 오면 무기가 아니라 짐이 된다.
둘째, 스타트업은 제도가 필요 없는 조직이 아니다. 다만 제도의 순서와 크기가 다를 뿐이다.
셋째, 창업자 중심 회사에서는 인사담당자가 권한보다 신뢰를 먼저 얻어야 한다.
넷째, 평가·보상 제도를 만들기 전에 조직이 무엇을 성과라고 믿고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다섯째, 좋은 인사담당자는 제도를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조직이 받아들일 수 있는 기준을 함께 만드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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