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 9시, 본사 대회의실 공기는 평소보다 조금 무거웠다.
제조업 본사 기획팀 김민석 차장은 노트북을 열어놓고도 화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지난 분기 실적은 또 목표를 밑돌았다. 원가율은 올랐고, 수주는 밀렸고, 경영진 회의에서는 “생산성 개선”이라는 말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나왔다.
그날 인사팀장은 새 평가제도 설명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올해부터는 AI 활용 역량과 생산성 개선 기여도를 평가에 반영하겠습니다. 단순 근속이나 투입 시간이 아니라, 더 빠르고 더 효과적으로 성과를 낸 사람을 보겠습니다.”
말은 맞았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민석은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회의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오자, 옆자리 박상우 대리가 벌써 보고서 초안을 띄워놓고 있었다. 상우는 30대 초반이었다. 프롬프트를 잘 썼고, AI 도구도 여러 개를 동시에 다뤘다. 어제 오후에 요청받은 시장 분석 자료를 오전 중에 거의 완성해냈다.
“차장님, 이거 AI로 1차 뽑고 제가 정리했습니다. 속도는 확실히 빨라졌습니다.” 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서는 보기 좋았다. 문장도 매끄러웠고, 표도 깔끔했다. 예전 같으면 사흘은 걸렸을 자료였다. 그런데 몇 줄을 읽다 보니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경쟁사 매출 추정치가 오래된 자료를 기준으로 잡혀 있었고, 국내 유통 구조에 대한 해석도 현장 상황과 조금 달랐다.
민석은 조용히 말했다. “상우야, 이 부분은 다시 봐야겠다. 숫자는 빠른데 맥락이 좀 틀렸어.” 상우는 살짝 멋쩍게 웃었다. “아, 그렇네요. AI가 최신 자료처럼 써놔서 저도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 순간 민석은 생각했다. 빠르게 만든 보고서가 성과일까. 아니면 그 보고서의 오류를 찾아내고, 재작업을 막는 것도 성과일까.
점심시간, 구내식당에서 상우가 먼저 물었다. “차장님, 솔직히 이제 AI를 많이 쓰면 좋은 평가를 받는 건가요?”
민석은 물컵을 내려놓았다. “나도 그게 궁금하다. AI를 쓴 양을 볼 건지, AI로 해결한 문제를 볼 건지 아직 잘 모르겠어.”
상우가 다시 말했다. “그럼 AI가 만든 보고서도 내 성과로 인정되는 건가요?”
그 말에 민석은 대답을 못 했다. 보고서를 만든 것은 상우였다. 하지만 초안은 AI가 만들었다. 검토는 민석이 했다. 최종 방향은 팀장이 잡았다. 그럼 성과는 누구의 것인가.
며칠 뒤 평가 면담이 있었다. 최팀장은 50대 초반이었다. 경험 많은 관리자였지만, AI 활용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그는 면담표를 보며 말했다. “민석 차장은 안정적이야. 그런데 요즘은 속도도 중요하잖아. 상우 대리는 AI를 써서 산출물이 빠르더라고.”
민석은 잠시 침묵했다. “팀장님, 속도는 인정합니다. 다만 AI 결과물을 검증하고 수정한 사람의 기여는 어떻게 평가하지요?”
최팀장은 펜을 돌리며 말했다. “그게 참 애매해. 보고서 최종본만 보면 누가 어느 정도 기여했는지 잘 안 보이거든.”
민석은 마음속으로 한 문장을 삼켰다. ‘팀장이 AI를 잘 모르는데, AI 활용 성과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까?’
그 질문은 불만이라기보다 불안에 가까웠다. 평가자는 성과를 판단해야 한다. 그런데 AI가 개입한 성과는 겉모습만 봐서는 알기 어렵다. 누가 단순 복사했는지, 누가 검증했는지, 누가 비즈니스 맥락을 잡았는지 드러나지 않는다.
그날 저녁, 생산관리팀 준호 과장이 민석 자리로 왔다. 준호는 현장 출신이었다. 설비, 작업자 배치, 납기 조정, 불량 이슈를 매일 붙잡고 사는 사람이었다. “형, 본사는 그래도 AI로 문서라도 빨라지잖아. 우리는 현장 데이터가 엉망이라 AI를 써도 바로 안 먹혀. 그런데 평가 기준은 똑같이 생산성 개선이래.”
민석이 물었다. “현장에서는 뭐가 제일 걱정인데?”
준호는 낮게 말했다. “본사 기획이나 마케팅은 AI로 빨라지는데, 현장 직무는 왜 같은 기준으로 평가받아야 하지? 내가 일을 못한 건가, 아니면 내 직무가 AI 효과를 덜 받는 건가?”
그 말이 민석의 가슴에 오래 남았다.
AI는 누구에게나 같은 도구처럼 보이지만, 실제 직무에 들어가면 다르다. 문서 작성, 자료 조사, 기획안 정리는 빨라질 수 있다. 하지만 설비 문제, 품질 이슈, 노사 조율, 납기 대응은 단순히 프롬프트 몇 줄로 끝나지 않는다. 문제는 회사가 그 차이를 충분히 보지 못할 때 생긴다. AI를 많이 쓰는 직무는 생산성이 오른 것처럼 보이고, AI 효과가 제한적인 직무는 뒤처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사람들은 평가를 신뢰하지 못한다.
“결국 구조조정하려고 명분 쌓는 거 아니야?”
복도에서 누군가 그렇게 말한 뒤로, 사무실 분위기는 더 가라앉았다. AI 평가, 생산성 개선, 실적 악화. 이 세 단어가 한 문장 안에 들어가면 40대 직장인들은 본능적으로 긴장한다. 민석도 마찬가지였다.
18년 동안 그는 빠른 사람보다 틀리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했다. 보고서 한 줄이 임원회의에서 어떤 의미로 읽힐지 고민했고, 숫자 하나가 현장에 어떤 부담으로 내려갈지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회사는 그런 판단보다 속도를 먼저 보는 것 같았다.
며칠 뒤 팀 회의에서 최팀장이 말했다. “이번 달부터 AI 활용 사례를 팀별로 정리해서 제출하라고 합니다. 좋은 사례는 평가에도 반영될 수 있고요.”
상우가 말했다. “그러면 사용 횟수나 자동화 건수를 쓰면 될까요?”
민석은 처음으로 회의 중간에 말을 끊었다. “그렇게만 보면 위험합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민석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AI를 많이 쓴 사람을 평가할 것인가, AI로 문제를 잘 해결한 사람을 평가할 것인가. 이걸 먼저 정해야 합니다.”
최팀장이 민석을 바라봤다.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야?”
“AI 사용량은 성과가 아닙니다. 성과는 문제 해결입니다. 시간을 줄였는지, 오류를 줄였는지, 의사결정 품질이 좋아졌는지, 재작업을 막았는지 봐야 합니다. 그리고 직무마다 AI가 먹히는 정도가 다르니 같은 기준으로 줄 세우면 안 됩니다.”
상우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빠르게 만드는 사람이었지만, 민석의 검토가 없으면 보고서가 몇 번씩 다시 돌아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준호 과장도 덧붙였다. “현장은 AI 활용 건수보다 데이터 정비, 불량 원인 추적, 작업자 설득 같은 게 더 큽니다. 그걸 생산성으로 봐주지 않으면 현장 사람들은 평가를 못 믿습니다.”
최팀장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평가자는 이제 결과물만 보는 사람이 아니라, AI가 들어간 업무 과정을 읽어내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날 밤, 민석은 야근을 마치고 불 꺼진 사무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창밖에는 공장 쪽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다. 모니터에는 그가 새로 정리한 평가 항목 초안이 떠 있었다.
AI 활용 여부.
문제 해결 기여도.
검증 및 품질 관리.
직무별 적용 가능성.
협업과 판단 기여.
민석은 문득 생각했다. AI 시대에 40대 직장인은 무엇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나? 예전처럼 오래 버틴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렇다고 젊은 직원보다 더 빠르게 도구를 쓰는 것만이 답도 아니다. 40대에게 남은 힘은 경험을 고집하는 데 있지 않다. 경험을 AI와 연결해 설명 가능한 성과로 바꾸는 데 있다. “나는 AI를 몇 번 썼는가”가 아니라,
“AI로 어떤 문제를 줄였는가.”
“어떤 오류를 막았는가.”
“어떤 판단을 더 정확하게 만들었는가.”
“내 직무의 맥락을 어떻게 성과 언어로 바꾸었는가.”
퇴근길 엘리베이터 안에서 민석은 휴대폰 메모장에 한 줄을 적었다. 성과는 속도가 아니라, 책임질 수 있는 결과다. AI는 분명 직장인의 일하는 방식을 바꾸고 있다. 하지만 평가가 함께 성숙하지 않으면, AI는 생산성 도구가 아니라 불신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회사는 이제 물어야 한다. 누가 AI를 많이 썼는가가 아니라, 누가 AI를 통해 더 나은 판단과 결과를 만들었는가를. 그리고 40대 직장인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내 경험을 과거의 방식으로 방어하고 있는가. 아니면 AI 시대의 새로운 성과 언어로 번역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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